

커플링 / 조합 요소 : 릭 X 미아
영원한 2월 29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안식처로 돌아온 릭 톰슨은 시계들을 풀어내다 협탁 위의 탁상 달력에 시선을 두었다. 달빛을 받아 잉크 자국이 반짝이는 것에 시선이 묶여 조심스레 들어 올리고는 꾹꾹 눌러 쓴 글자를 손 끝으로 더듬던 그는 소리 죽여 웃으며 두어 달 전 연말 선물로 그랑플람에서 나누어 준 달력을 낚아채던 작은 손을 떠올렸다.
한적한 공원 테이블에 자리를 잡더니 눈을 데로록 굴리며 그의 생일에 꽃을 가득 그려 넣던 작은 여자. 이름이라곤 미아라는 이탈리아 단어가 전부인 그녀는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재잘거리며 자신의 친구인 미쉘 모나헌의 생일을 찾아 표기하였고, 어디서 들어 알았는지 그와 동행했던 벨져 홀든의 생일도 기억하고 있었다. 평범한 날짜들 위에 이름과 함께 앙증맞은 낙서를 이어나가던 그녀는 달력을 쥐고 한참을 뒤적거리다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막히는 거라도 있소?" 그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 2월의 달력을 펼친 채 내밀어 보이던 그녀는, "미아 생일은 이번에도 없어서." 평소에는 잘 보여주지 않던 씁쓸한 표정을 머금은 채 시선을 마주했다. 2월 29일, 윤일이라 하던가. 비어있는 칸을 바라보며 작게 탄식하던 그는 볼펜을 쥐고 있는 미아의 손을 톡톡 건드렸다.
"29일을 만들어볼까. 그대의 생일 파티를 하는거요."
꺄르르 웃음을 터트릴 거란 생각과 달리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겨우 고개를 끄덕인 미아는 빈칸에 조심스레 29를 적어 넣고는 한참 동안이나 자신의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한숨처럼 뱉은 속삭임은 분명 고마워, 였으리라.
"있지, 릭. 생일 파티는 어떻게 해? 29일은 없는걸."
"비밀이오. 서프라이즈를 할 예정이니까."
"이미 파티할 거라고 말했으면서! 치사하게 생일 주인공한테도 비밀로 하는 거야?"
"하하, 그렇게 말해도 어쩔 수 없소. 준비는 내가 할 테니 그대는 초대장을 준비하는 게 어떨까. 함께 하고 싶은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는 거요. 미아의 생일 파티에 함께 해달라고."
공허하던 표정을 지운 그녀가 입을 삐죽이며 펜을 건네자 작은 포탈이 열린 허공으로 던져버리고 이번에는 찡긋거리는 콧잔등을 톡톡 건드렸다. 번쩍 떠오른 아이디어가 미아를 웃게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으며 간질거리는 입을 꾹 다물기 위해 간식으로 도넛을 사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가 바뀌고 달이 바뀌어도 릭 톰슨은 회사에서 돌아와서도 서류 더미-정확히는 잡지와 도서-에 파묻혀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젊은 여자의 취향이라거나, 근사한 생일 파티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 센스, 음식까지.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다는 걸 간과한 스스로를 꾸짖다가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던 작은 여자를 생각하면 멈출 수가 없게 되었다. 약속한 생일 파티를 위해 맛 좋다는 레스토랑을 알아보거나 선물을 사주기 위해 나름의 예산을 빼두기도 하며 정신없는 한 달을 보내던 중 익숙한 공원 구석에서 그녀를 다시금 마주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핫도그와 콜라를 손에 쥐어준 릭은 미아에게 초대장은 잘 만들고 있는지, 누구를 얼마나 부를 생각인지 넌지시 물어보았고 그녀는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한 장도 만들지 않은 거요? 친하게 지내던 모나헌 남매라던가, 그랑플람의 마틴 챌피. 정 부를 사람이 없다면 헬리오스의 꼬마들이라도 함께 하는 것이 어떠오." 때늦은 산타클로스처럼 여러 사람들의 축하 속에서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좋은 시간을 선물하려 했던 그는 음식물이 넘어가지 않는지 몇 번이고 핫도그를 올렸다 내리길 반복했다.
"딱 한 장 만들었어."
샛노란 종이에 직접 그린 듯한 작은 꽃 낙서들. 그리고 적혀있는 릭 톰슨, 자신의 이름. 고급진 식사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순간을 선물하려던 그는 걱정을 뱉던 입을 다물었다. 이 아가씨를 어쩌면 좋을까.
"내 생일을, 미아를 기억해주는 한 사람이랑 같이 보내고 싶은데 받아줘, 릭."
"나 참. …그대를 어떻게 말리겠소."
레몬 파운드케이크, 스프링클이 잔뜩 묻은 초코 도넛, 스트로베리 스파클링. 파티를 위해 그녀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적어둔 메모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옷을 사주는 게 좋을까 싶어 펼쳐보던 잡지도 각지게 접어 책상 한 켠에 두었다. 참고라도 될까 싶어 작은 아가씨들이 나오는 소설책의 책갈피를 거둔 채 잡지책 위에 올려두었다. 2월 28일, 릭은 제법 가벼워진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벤치에 앉아 두 다리를 흔들던 미아는 익숙한 얼굴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에 왁스를 바르고 제법 그럴싸한 차림으로 그녀를 반기는 릭은 자신이 계획한 일정을 들려주었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나라를 옮겨 다니며 시차를 통해 2월 28일과 3월 1일의 경계에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은 그가 두어 달 고민한 그녀의 생일 파티였다.
유명한 여행지부터 시작해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장소에, 익숙한 음식부터 생소한 메뉴까지, 그는 그녀에게 여러 세상을 보여주었다. 어느 나라에서는 전통 의상을 빌려 입고 그들만의 왈츠를 추기도 했고, 사진기를 가져와 맘껏 풍경을 담아내기도 했으며, 길가에 피어난 이름 모를 작은 꽃에 멈칫거릴 때면 화분에 옮겨 담아 더 넓은 꽃밭으로 옮겨주기도 했다. 릭은 미아의 얼굴을 간지럽히는 겨울바람이 신경 쓰였는지 목도리를 고쳐매어주며 "즐겁소?" 질문을 흘렸다. 환한 웃음으로 대답하는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럽다는 듯 머리를 쓸어주었다. "릭, 하늘을 봐!" 어느덧 밤이 되었는지 어둑한 하늘에 설탕을 뿌린 것처럼 별이 가득 박혀있는 것을 올려다보던 릭은 왼팔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느 나라로 가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바람이 강하게 불어 짧게 비틀거렸다.
잠시 주춤하며 기울던 자세를 고치고 바르게 서자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미아의 얼굴을, 맑은 녹안에 떠있는 별들을 마주한 릭은 그제서야 자신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손잡으시겠소?"
내밀어진 손을 기다렸다는 듯 쥐어낸 미아를 가볍게 제 품으로 당긴 릭은 발밑 아래 게이트를 열었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2월 29일로."
도착지를 정하지 않고 게이트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공간의 어딘가에 머무르게 된 두 사람은 마주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무수히 펼쳐진 밤하늘, 우주의 한 조각을 시선 끝에 담았다. 중력을 잃은 몸은 비틀거렸고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의 표정을 가히 경이롭기도 했다. 릭은 왈츠를 추듯 미아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았고 그녀가 기다리던 말을 속삭였다.
"생일 축하하오. 나의 그대야."
그대는 나의 겨울이자 봄.
꽃처럼 피어난 사람.
무대 위에 선 배우들 마냥 느리게 발을 옮기며 배운 적 없는 춤을 추었고 들은 적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우주 어딘가를 빌려 함께 간직할 수 있는,
영원한 2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