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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링 / 조합 요소 : 릭 & 미아, 미쉘 X 미아

선물

/ 릭이 하는 미아의 이야기. 미쉘과의 연애 요소가 있습니다.

 

 

  그 애는 항상 무릎이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옆에 덩그러니 놓인 형제의 마른 손을 두고서 제 두 다리로 지탱하는 법을 남들보다 빨리 깨우쳤는데도 그랬다. 문득 돌이켜 보면 태생이 고만고만하게 이기적이고 다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썩 자랑스럽진 않겠지만 그러한 빈손이 그 애를 그 애답게 만들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부르튼 살갗에 알싸한 멍을 달고 있으면 어릴 적부터 자주 넘어지진 않았니, 하고 넌지시 던져지는 그런 걱정들을 그 애는 이용할 줄 알았다는 소리다.

말을 돌리기 잘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법이라도 있는 걸까. 남들 앞에서는 쉽게 덤벙거리던 아이도 밤이 되면 곧 닥쳐올 불행을 불면을 핑계 삼아 꼼꼼하게 어루만져 보았다. 체념만이 짙게 드리워져 애석하게도 자기 연민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었다. 조용한 시간을 못 견디고, 불안을 느끼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지만 그럴수록 더욱 적막에 가까워졌다. 아마 그때 비로소 그 애가 혼자 있길 생각보다 내켜 했는지 고려하게 된 것 같다.

  그래요, 미스터. 하지만 당신처럼 일부러 잠을 기피하는 건 아니니 나에게 커피는 필요 없어요. 발코니 밖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작은 것 치고는 음절 하나하나가 또렷하고 짐짓 맹랑했다. 다만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상상하기 조금 어려운 게 흠이었다.

집을 마련한다면 카우치가 필요하겠군. 그것도 노란색으로 말이오. 우스갯소리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애에게는 비밀이지만 사실 창문에 달아둘 커튼을 미리 사두었다. 이탈리아에 가서 손수 고른 회색 커튼이었다. 정작 안타깝게도 지금 필요한 건 어떤 여자아이의 낡아빠진 담요로 보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것이 그 애가 갓 스무 살을 넘긴 해였을 것이다.

우리는 곧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상상을 하고 잠에 들었어요.

알고 있었던 거죠. 숲이 상하기도 전이었는데, 실은 오래도록 길을 잃기 바랐던 거예요.

한동안은 커피를 타지 않게 되었다. 우유에 꿀을 넣어주고 싶었지만 그 애는 언제나 비린 채로 마셨다. 닮은꼴이라 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무언가를 기대하기에 둘 다 필요 이상으로 건조한 사람들이었다. 정작 본인은 네 살 어리다는 이유로 저보다 키가 큰 여자아이에게 코코아를 타주는 버릇이 있었으나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좋아하오? 그렇게 묻는다 한들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이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집주인은 언제나 그렇듯 덜 데운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만 했다.

사람이 싫은데, 사람이 필요해요. 아이는 자주 웃는 편이었다. 그런 구조로 태어난 거겠죠? 분명……. 통기타를 손수 매만지는 내내 튜닝 기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감추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후 두 시를 넘어갈 즈음 악기를 매고 공원을 찾아가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갑게 식은 표정이었다. 그 애는 거대한 덩어리처럼 서로 엉키고 있는 수많은 구둣발 속에서 쉽게 휩쓸렸다가 날이 저물면 고스란히 토하듯 내뱉어졌다. 그럴 때마다 늘어나는 다리의 생채기가 그 애를 더욱 외로워지도록 만드는 것 같았다.

알고 있을까. 저 멀리서 군중을 바라보고 있는 그 애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듯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주먹을 가볍게 쥐곤 했다. 거기서 미약한 경멸을 읽은 것은 썩 쉬운 일이었다. 마치 테이블보의 얼룩을 발견한 사람처럼 아이에게는 껄끄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언제부터였소? 잘 알잖아, 사람은 사람 없이 살 수 없어. 설령 그대가 내민 손에 미련을 갖는다고 해도 그 무엇도 추해지지 않아. 이해할 수가 없군. 자신에게서 그자를, 독으로 된 숨을 내뱉은 여자를 찾는 것은 그저 흠집밖에 되지 않는데. 상처를 내는 일에 익숙해지려 들지 말아야지. 그래서 그녀가 그대에게 넘겨준 거잖소, 분홍색의 그 보드라운 담요를.

적당히 자란 손톱에 걸린 현에서는 물이 흘러내려 가는 소리만 작게 나다 말았다. 문득 창문을 열어야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 자리서 일어섰다.

그 애는 열여섯을 넘겼는데도 키가 부쩍 자란 여자아이와 관계 자체는 긴밀했지만 나눈 대화는 손에 꼽을 만큼 애절한 모양새로 지냈다. 그리고 어느 날 여자아이가 닥터와 함께 홀연 듯 자취를 감추었을 때 아이는 우유 한 잔만 달라 말했다.

  내가 그 여자처럼 된다면 무엇이 남죠? 미쉘은 나를 버리고 간 게 아니에요.

  떠나기 전 그녀가 자신의 무릎을 양손으로 덮은 순간 덧없이 부끄러워졌다고, 어깨에 둘러준 담요를 어째서인지 무릎에 덮어야 할 것만 같았다고. 무릎이 하얘진 기분이었노라 고해하는 창백한 낯은 사랑을 하는 사람치고는 쫓기고 있는 것처럼 보여 젓고 있던 티스푼을 내려놓았던 거로 기억한다. 모든 사랑이 로맨틱 하라는 법은 없다지만 애석한 일이었다.

  작은 뺨에 드리웠던 그늘이 걷어지면서 그 애는 고개를 젖혔다. 그럼에도 오늘은 날씨가 좋아. 마치 비극에 익숙해지는 과정 같이 말이야. 불어보는 바람에 커튼이 나부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에 무어라 토를 달기에는 그들은 그들로서 결속되어 있었고 그 애가 말하는 ‘우리’에는 여자아이도, 우유를 타주는 남자도 아닌 쌍둥이 형제만이 남겨져 있었다. 좁고 옅으면서 빠져나올 수 없는 관계들. 그건 훗날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단지 그뿐인 거겠지. 그 애가 구름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살에 찡그릴 때면 가장 어린 샛노란 잎으로 콧등을 덮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유에 꿀을 타주고 싶어 했던 것처럼,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그 애는 코코아에 마시멜로를 띄우고 싶어 했다. 고난 속에서 애정은 그런 식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자신에게 보여주고자 하듯이. 정작 모든 일이 끝난다면 그녀를 그녀의 남동생과 함께 저 멀리 데려가 주세요, 아니면 날 아무도 모르는 곳에 두고 가 줘, 따위의 소리는 하지 않았지만. 릭 톰슨은 그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친애하는 작은 숙녀에게,

행선지는 냉장고에 메모지를 붙여놨소.

담요는 잘 말랐으니 걱정하지 말고

돌아오는 2월 29일에 다시 보도록 하지.

    

p.s. 준비물 : 따뜻한 코코아 세 잔. 천장에 마시멜로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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