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ry Christmas!
첫 단추.
탄야X릭 / w. 나와동행하자
그러니까, ……. 내게 언제부터 거부할 권리가 있었나. 구르라면 구르는 거지.
릭 톰슨은 구겨진 미간을 손끝으로 짓누르며 다른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이제는 더는 쌓을 곳도 없는 서류를 용케도 제 자리 한 구석에 밀어 넣고 가는 캘리의 뒷모습을 보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다른 이들에게 곧잘 평가당하는 '비즈니스 미소' 가 그의 얼굴에서 사라진 지도 삼 일째다. 벌써 이주 째 이어지는 야근과 동시에, 일주일 넘게 계속되는 전장에서 발을 뺄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부하 직원 걱정이라곤 티끌만큼도 내비치지 않기로 유명한 속 직속상사인 러플이 '요즘 괜찮으냐,' 고 물을 정도니까.
거리는 한 달 전 부터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느라 부산스러웠다. 그러니까, 지금이 꼭 한 달 째 되는 날이었다. 제 가게의 상품을 장식으로 내건 트리, 문마다 붙어있는 리스, 속이 빈 선물 상자 모형들, 각종 색으로 빛나는 전구 같은. ……. 자신도 저 거리의 한쪽에 녹아들어 레몬 머랭 타르트 따위를 입에 물고 있어야 했는데. 얇은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너무도 다른 풍경의 회사 내부를 둘러본 릭 톰슨은 짧게 혀를 짜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갈 용기도 없으면서 괜한 생각을. 이제는 작은 모니터 너머의 글자가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도 오랜 시간 생각을 거듭해야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얌전히 코를 박고 이 서류가 제 상사에 의해 바닥을 구르던가, 결재되던가, 둘 중 하나는 맞닥뜨려야 할 운명이니.
…아. 모레가 크리스마스던가?
─
" 너,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지? "
우악스럽게 잡혔던 멱살이 놓임과 동시에 시야가 크게 흔들린다. 꼴사나운 자세로 바닥을 나뒹굴지 않은 건 자신의 뒤를 부축해주고 있는 스티븐슨 때문이겠지. 감사의 인사 대신 짧게 손바닥을 들어 보이자 손길이 거두어진다. 제 앞에서 미미한 살기를 내뿜고 있는 홀든 경의 모습을 보자 절로 눈이 감긴다.
분명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은 전장에서 보일 모습이라기엔 무모했고, 멍청할 만큼 용감했다. 단 한 걸음만.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비튼 공간에 그들의 머리를 넣을 수 있었는데. 그렇게만 됐다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승리를 손에 거머쥘 수 있었을 테고, 나는 이 지긋지긋한 풍경에서 발을 돌릴 수 있었을 것이고, 그토록 바라던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었을 텐데. 왜. 대체 왜.
비명과도 같은 제 이름이 귓가에 울려 퍼지고 나서야 안개로 흩어졌던 여자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걸 인지했다. 빠르게 자신의 앞으로 던져지는 검, 솟아나는 불길, 굉음과 함께 바닥으로 내려앉는 나무 벽, ……. 눈꺼풀이 닫히고, 다시 열리는 그 모든 과정이 아주 천천히 반복되는 듯싶었다. 그 찰나의 시간에 뻗어지는 보랏빛의 손끝. 자신의 독에 질린 것처럼 보이는 어두운색의 손톱. 죽은 빛의 피부. 그런 손가락 사이로 춤추듯 흩어지는 머리카락.
자신이 열었던 공간의 틈새로 날아가 버린 것 같은 정신을 되찾아온 지금에서야 자조적인 웃음이 잇새로 흘렀다. 물론 이건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었고, 사소한 실수로 인해 이 자리에 선 이들을 잃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한 마음에 온몸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수백, 수 천 번은 겪었을 죽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익숙해지리란 법은 없으니까. 나의 죽음도, 타인의 죽음도.
아니, 그게.
"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다. 너 하나 때문에 모두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두 번은 없을 거란 걸 명심해. "
씁쓸한 표정으로 뒤에 이어질 말을 삼킨다. 그 어느 것 하나 틀린 말은 없었으니, 섣불리 입을 열 처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다만,
" 어쩜, 가여운 것. 왜 이리 기운이 없어 보일까. 아까의 그 기세는 어디로 가고. 이래서 날 잡을 수야 있겠니. "
이 자를 이렇게 빨리, 다시 눈앞에서 볼 줄은 몰랐는데.
본능적으로 코를 움켜쥐게 만드는 향수 냄새. 독을 감추려던 행동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타인의 뇌를 직접 잡고 흔들게 할 요량이었다면 아마 보기 좋게 성공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서둘러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벽 너머로 들리는 폭격 소리에 빠르게 다른 공간 너머로 잠시 몸을 옮겼다. 자, 생각해 보자. 생각. 돌아가면 공간을 비틀고, 넘어뜨려서, 그녀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를 확인한 다음, …….
" 오, 그렇게 얼빠진 얼굴로 고민할 시간은 있나 보구나. "
시간과 공간이 흐르거나 움직이지 않는 곳에서의 멈춰있는 기분이란,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다. 황홀하다거나, 들끓는다거나, 차갑게 가라앉는다거나. 그런 부류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로,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그곳은 제 몸이 꼭 들어찰 만큼 좁은 곳이기도 했고, 우주의 한 조각보다 드넓은 곳이기도 했다. 뜨겁고, 차갑고, 부드럽고, 딱딱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배제당했고, 혀 아래에 짓이겨 놓기도 했다. 가끔은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 위가 있을 자리 그 어딘가에 멈춰있기도 했고.
" 죽어. "
분명 뭔가 더 말했나? 아니, 말을 하고 있나? 그것도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 오래 이어진 전투를 감당할 수 없었던 립스틱이 입술선을 벗어나 뭉개져 있는 게 보였다. 그것이 기억의 끝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 전장에서 다시 눈을 뜨는 일은 없을 거란 걸 깨달았다. 어두워지는 시야 너머로 패배를 직감한 홀든 경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후로는 적어도 새벽녘의 빛이 흘러들어오는 안개가 자욱한 광장이거나, 운이 좋다면 제가 그토록 바라던 침대 위일 수도 있을 것이다.
─
…아.
평소보다 열네 배쯤 욱신거리는 어깨의 통증에 눈을 떴다. ……그러니까, 눈을 떴다. 그것뿐이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을 만큼 망가진 몸을 인지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잘도 자더구나. "
아, 아니. 한 가지 더 있었다. 그 상태에서 소리가 들린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것. 깜빡, 시야가 움직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수 많은. ㅡ (사실 두 가지의)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이곳에서 들리는 거지? 왜, 그 목소리가 이토록 익숙해서, ……?
" 어제 네 얼굴이 얼마나 새하얗게 질리는지 궁금하기는 했는데. 넌 매번 날 놀라게 한다니까. 방금 눈을 맞고 온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는걸. "
방구석에 있던 손님용 의자는 어떻게 알고 꺼내온 건지. 마치 자기 집인 양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네게 시선이 멈춘다. 초대받지 않은 그 손님은 잠에서 깨어 한마디도 하지 않던 이 집의 주인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지막 전투 이후로 눈을 뜨지 않는 자신을 어떻게 처리할. ㅡ (정말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이거 정말 너무 한 거 아니야?) 것인지. 겉으로 보기에 심각한 외상은 없었으나,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 것이 맞는 것 아닌지. (이걸 고민해야 하는 문제라는 게 더 신기했지만) 이후로 짧은 의견이 오갔지만, 결국은 제집을 알고 있는 자신이 이 집에 무사히. ㅡ (이 부분을 특히 강조했다) 데려온 것이라는 문장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입을 닫았다.
…어, 그러니까. 일단은. …….
" 고맙다는 인사부터 해야지. "
아. 그렇지. 고, 고맙소. …….
또다시 이어지는 침묵. 그녀는 이제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양, 잘 말린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내기 바빴다. 되려 말을 걸기 주저해질 정도로 열중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머쓱한 얼굴로 천장을 눈에 담았다. ……저 무늬가 저렇게 생겼었나. 전등 아래에 얼룩은 또 뭐고. 곧 벽지를 새로 발라야 할 것도 같은데. …그나저나, 그녀가 왜 내 집을 알고 있는 거지? 지금까지 이곳에 남은 이유는 뭐고?
" … … …그러니까, 오늘 나가지 못한 의뢰의 수고비를 네게 대신 받아내야겠어. "
앗, 하는 사이에, 네가 뱉는 문장의 끝맺음을 흘려 들으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아예 꼬아낸 무릎에 팔꿈치를 올려 턱까지 괸 채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인다. 지그, 음. 뭐라고. ……? 자신이 들어도 헛웃음이 나올 법한 질문이었다. 심지어 급하게 말을 삼켜내느라 숨이 끊어진 부분에선 눈꺼풀이 떨리기까지 했다.
" 멍청한 건 달갑지 않은데. "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그게 마치 신호라도 된 것 마냥, 약간 멀어졌던 의식이 빠르게 제자리를 되찾았다. 물론 네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눈을 감기 이전에 있었던 일, 지금 그녀와 내가 놓인 상황, 그리고 그런 말을 한 의도 따위를 생각한다면, ……. 제가 이 모든 걸 부정하기 위해 하려는 말임을 그녀도 알고 있을 테지. 다만 이해하기 싫었던 내면의 자신이 내뱉은 말을 빠르게 수습하려 예의 '그' 미소를 지었다.
" 아, 그리고 이것도 말했나? 네 전화가 세 번 정도 울리길래 받았어. 지독하게도 울리길래, 그렇게 독촉받는 듯한 느낌은 싫어서 말이야. 대충 네 행방을 묻는 것 같았는데. 내 앞에서 귀여운 얼굴로 잠들어 있다고 전했지. "
…행방을? 물었다고? 구태여 그럴 이가 없을 텐데. 내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할 사람이. …….
잠깐.
…지금이 아침인가?
" 용케도 아는군. 정확히 오전 7시 48분을 넘어가고 있지. "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방 안에 있건, 말건, 지금 내 몸이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출근 시간 전이라는 것과 자신의 능력이면 지각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전장을 나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고, 전해 들은 이야기는 자신의 일과가 모두 끝난 이후로 미루면 될 일이었다. 그녀가 보내주지 않는다고 해도, … 아주 잠깐이라면 헌터의 눈을 벗어나는 일은 쉬우니 어떻게든 되겠지. 양쪽 다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긴 하지만, 당장 비껴가야 할 목숨의 위협보단 더욱 먼 미래를 챙기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 그리고 넌 꼬박 하루를 넘게 잠들었지. 그 전화는 어제였어. "
…아, 신이시여.
" 기껍게도 오늘이 크리스마스라더군. 넌 이럴 때 뭘 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안 그래? "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 내 목숨줄을 쥐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인 거란 소리지. …….
" 오, 아니. 넌 그냥 그렇다는 답만 하면 돼. 이다음 질문에도 똑같이. 내가 네게 받아낼 의뢰비는 네 하루를 사는 거로 할 거니까. 뭐, 얼굴만 본 것도 산 거로 치면 이틀이겠지만 말이야. "
네 하루가 그렇게 비싼가? 덧붙여지는 말은 거의 놀리는 투에 가까웠다. 허나 그 어투까지 지적하기에 제 정신상태는 심히 어지러운 상태였고, 무언가의 답을 도출하기 위해 다다라야 하는 생각과, 생각과, 그 꼬리 물기를 할 수가 없어서, …….
" 마침 화이트 크리스마스기도 하니까, 네 얼굴색이 정말로 눈과 같은지 궁금해서 말이야. 그것만 확인하면 놓아주지. "
……아무리 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정말 확인할 것이 그것뿐이라면 지금 당장 발을 돌려 나가도 될 텐데.
그리고, 이상하게도, 마치. …….
패배를 직감한 홀든 경의 얼굴을 보며 그 전장에서 눈을 뜰 수 없을 것이란 걸 직감한 것 마냥,
짙은 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는 적어도 오늘 내로 회사에 돌아갈 수는 없을 거란 걸 직감했다.